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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 Arts

정치는 사람들의 상식을 누가 만들어 가느냐의 싸움 - 골보다 뜨거웠던 2026 월드컵의 행동과 메시지들

 

 

 

월드컵 4강이 정해졌다. 모두가 우승 후보로 점쳐지던 나라들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이 없는 것은 못내 아쉽다. 한국 축구를 둘러싼 논쟁들은 그 다음을 향한 쓰라림 또한 마음에 남는다. 그럼에도 월드컵은 축구 경기임과 동시에 오늘날 세계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사회적 무대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알려줬다. 선수와 감독, 관중들이 보여준 연대와 저항, 그리고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스포츠가 사회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여실히 보여주었다.

 

 

트럼프의 FIFA 평화상 수상으로 시작해서 중계권을 둘러싼 미디어 기업들의 볼썽사나운 경쟁, 경기의 맥을 끊는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 속 숨겨진 광고 이윤의 노림수, 퇴장 당한 미국 선수에 대한 징계를 중단시키며 세기의 반칙을 해댄 트럼프와 FIFA의 모습, 이란 선수 비자를 막아 하루 전 경기장이 있는 장소로 갈 수밖에 없었던 차별대우에 이르기까지 이번 월드컵은 자본과 권력의 잔치라는 악담을 들어도 시원찮은 대회였다. 그럼에도 선수들과 코칭 스텝, 관중 그리고 전 세계 인류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감동스럽고 아름다운 행동과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월드컵 기간 달라진 모습들.
 
'Stop Hate' 캠페인 - 이번 월드컵 기간 경기장 곳곳에서 "WE PLAY TOGETHER. WE STAND AGAINST HATE"(우리는 함께 경기하고, 혐오에 함께 맞선다)라는 메시지를 내걸었다. AI를 활용하여 SNS상의 혐오 게시물을 모니터링했다. 수백만 건의 게시물을 분석했고 8만 건이 넘는 혐오 게시물을 적발했다
 
"입 가림 금지 규정(Mouth-covering rule)" - 상대 선수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입을 가린 채 말하는 선수는 대회 주최 측의 재량에 따라 퇴장(레드카드) 조치가 이뤄졌다.
 
'No Racism' 제스처 - 인종차별이 발생했을 때 선수와 감독이 심판에게 공식적으로 알릴 수 있는 'No Racism' 제스처(X 표시)가 실제 경기에서 사용되며 큰 관심을 받았다. 이 제스처를 통해 경기 중 인종차별이 발생하면 경기 중단이나 종료까지 이어질 수 있는 절차를 마련했다.
 
킬리언 음바페는 프랑스와 파라과이 경기 이후 파라과이 상원의원이 자신의 출신과 피부색을 겨냥한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자 공개적으로 이를 비판했다. 그는 공인의 혐오 발언은 용납될 수 없으며 축구는 차별이 아니라 존중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프랑스 정부와 축구협회도 그의 입장을 지지했다.

 

▲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월드컵 응원 모습 -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페이스북 제공

 

골 보다 뜨거웠던 행동과 메시지들


그러나 더욱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은 중계화면에서 삭제되거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향기는 널리 퍼져 지금도 전세계 SNS상에 떠돌고 있다. 스페인의 라민 야말이 보여준 304 세리머니와 팔레스타인 연대의 메시지, 콩고민주공화국 초대 총리인 루뭄바를 기리는 퍼포먼스, 이집트 대표팀 감독의 팔레스타인 연대 퍼포먼스, 그리고 가자지구의 전쟁 폐허 속에서 응원하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모습 등은 기억 저장소 속에서 절대 꺼내 지지 않을 명장면으로 기록된다.

 

 

#1.
가자 지구의 폐허에 사람들은 이집트 구호단체가 제공한 빔 프로젝트를 통해 월드컵을 봤다. 이집트와 호주의 경기에서 이집트가 16강에 진출하자 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경기가 마치고 한참 시간이 지나자 이집트 감독이 갑자기 경기장에 들어가 팔레스타인 국기를 펼쳐 보이며 '팔레스타인 해방!'이라고 외쳤다. FIFA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와 이를 말렸지만 그의 외침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인터뷰에서도 이번 경기의 영광을 팔레스타인에 돌린다고 말했다. 

동영상 링크
https://packaged-media.redd.it/8xxupjyx46bh1/pb/m2-res_1280p.mp4?m=DASHPlaylist.mpd&var=sgpssan&v=1&e=1783897200&s=0fad9dfc5349b010d162bc6221c64ea571f65b42

 

▲ 라민 야말이 지난 12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라리가 우승 퍼레이드에서 팔레스타인 국기를 들고 인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
스페인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경기. 가자지구 민중들은 누구를 응원했을까? 이상하게도 아랍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니라 라민 야말이 있는 스페인이었다. 라민 야말은 바르셀로나 소속의 18세 축구 천재다. 스페인을 4강으로 이끌고, 우승을 노리고 있다.


가자 민중들이 스페인을 응원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스페인 정부가 미국 트럼프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 이란 전쟁에 대해 사사건건 반대 입장을 내세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8세 축구 천재의 그간 행동 때문이다. 바르셀로나가 프리메라리가 2025-2026 시즌을 우승하고 퍼레이드를 할 때 야말은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며 폐허가 된 가자지구에 대한 연대를 표했다. 스페인 극우의 인종차별 속에서도 팔레스타인과 당당히 연대했던 그에 대한 강력한 응원의 메시지였다.


또한 그는 첫 골을 넣었을 때 손가락 3개와 손가락 4개를 보이는 퍼포먼스를 했는데, 이는 그의 고향인 이민자들의 동네 로가폰다의 우편번호 304를 상징하는 숫자다. 그리고 그의 축구화에는 부모의 모국인 적도 기니와 모로코의 국기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 출처 : news.history.199x 인스타그램

 

#3.
콩고민주공화국과 콜롬비아의 경기. 한 관중이 이상한 복장을 하고 가만히 서 있다가 천천히 입을 막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행동을 한다. 우리에겐 낯선 광경이지만. 콩고민주공화국의 축구팬들에게는 일상적인 장면이라고 한다. 이 사람은 국가대표 A매치가 열릴 때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초대 총리인 파트리스 루뭄바가 4개월만에 CIA와 벨기에의 공작으로 의해 총살당한 것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 콩고민주공화국 팬이 24일(한국시각) 멕시코 과달라하라 경기장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K조 콜롬비아와 경기에서 독립 영웅 파트리스 루뭄바 복장을 한 채 꼼짝하지 않고 응원하고 있다. 과달라하라/로이터 연합뉴스

 

루뭄바의 총살은 미국과 유럽 제국주의가 콩고민주공화국의 자원을 노리고 한 것이다. 이후 콩고민주공화국은 지금도 자원을 둘러싼 제국주의가 조장한 내전이 거듭되고 있다. 이 퍼포먼스의 주인공은 미국 비자를 받지 못해 루뭄바를 살해한 미국 땅에서 항의 퍼포먼스를 못하고 멕시코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콩고민주공화국이 32강에 진출했던 날, 거리에 나선 콩고민주공화국 민중들 속에서 또 다른 루뭄바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 콩고민주공화국 팬이 24일(한국시각)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K조 콜롬비아와 경기에서 독립 영웅 파트리스 루뭄바 복장을 한 채 응원하고 있다. 과달라하라/로이터 연합뉴스

 

정치는 사람들의 상식을 누가 만들어 가느냐의 싸움

"진보정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진보정치는 흔히 경제정책이나 복지정책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책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정의를 느끼고, 공감을 경험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상상할 때 움직인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것을 헤게모니라고 불렀다.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제도와 법률 이전에 먼저 사람들의 상식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람시는 "정치는 사람들의 상식을 누가 만들어 가느냐의 싸움"이라 했다. 월드컵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상식은 무엇일까? 예전에는 강한 영웅, 개인 스타, 국가주의가 중심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팀웍, 다양성, 연대 등이 중요한 가치로 등장하고 있다. 새로운 헤게모니가 스포츠 속에서도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거대 미디어 자본, 자본 광고, 스포츠 자본, FIFA의 상업화 등 축구장 밖에서는 여전히 자본주의가 기세 등등 하지만 경기장 안에서는 협동과 단결, 차별 철폐, 상호연대 등의 새로운 가치가 싹트고 있다.

 

▲ 라민 야말의 304 퍼포먼스  출처 - 로이터 통신

 

스포츠는 더 이상 사회와 무관한 중립지대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확인한 월드컵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은 모두 새로운 상식을 만들려는 시도였다. 말을 비롯한 여러 선수들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에 연대하는 메시지를 전했을 때, 그것은 특정 국가를 지지하는 정치적 선언이라기보다 전쟁 속에서 희생되는 생명의 존엄을 이야기하는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세계 곳곳의 팬들은 축구선수가 단지 골만 넣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을 표현하는 시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루뭄바를 기리는 퍼포먼스 역시 마찬가지다.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의 역사 속에서 희생된 인물을 기억하는 행위는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스포츠는 종종 승자의 역사만을 말하지만, 이번 월드컵은 잊힌 사람들의 역사도 경기장 안으로 불러들였다.


"전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인간성을 잃은 것“이라고 말한 이집트 대표팀 감독이 팔레스타인 연대를 표현한 장면은 선수와 감독 역시 세계 시민으로서 전쟁과 인도주의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반대로 상대를 조롱하거나 혐오를 표현하는 행위에 대해 심판과 대회 운영측이 단호하게 대응한 장면도 의미가 깊다. 과거에는 "경기의 일부"라며 넘어갔을 행동들이 이제는 공동체의 규범을 해치는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자유가 무엇이든 말할 권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존엄을 존중하는 책임과 함께해야 한다는 새로운 상식이 스포츠 안에서도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 준다.

 

▲ 파라과이의 미겔 알미론이 1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D조 튀르키예전에서 상대방 선수에게 손을 가린 채 말을 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이 선수는 즉각 퇴장 조치됐다. 사진 JTBC 화면 촬영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38407

 

진보정치에 던지는 월드컵의 질문들

첫째, 진보정치는 언제나 가장 약자 편에 서는 당파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팔레스타인이든, 전쟁 난민이든, 차별받는 소수자이든, 진보정치가 존재하는 이유는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사회의 중심으로 가져오는 데 있다. 그것은 특정한 국제정치 노선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가장 우선에 두는 정치의 원칙이다.
 
둘째, 기억의 정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루뭄바를 기억하는 것은 한 개인을 기념하는 일이 아니다.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착취의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사회는 같은 폭력을 반복하기 쉽다. 진보정치는 언제나 사회가 잊으려 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정치여야 한다.
 
셋째, 혐오와 조롱을 정치의 무기로 삼는 것들과의 싸움에 나서야 한다. 오늘날 세계 정치에서는 상대를 모욕하고 분노를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가 적지 않다. 그러나 월드컵은 반대로 혐오를 제재하고 존중을 규범으로 세우려 했다. 진보정치 역시 상대를 악마화하는 언어보다 시민을 설득하는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강한 비판은 필요하지만, 민주주의는 적을 파괴하는 기술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규칙을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넷째, 상징은 정책만큼 중요하다. 사람들은 정책집을 읽기보다 한 장면을 기억한다. 한 번의 세리머니, 한 번의 연대 행동, 한 번의 침묵이 때로는 수백 페이지의 정책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진보정치는 숫자와 통계만이 아니라 감동과 상징을 통해 시민들과 만나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진보정치는 상징만으로 만족해서도 안 된다. 팔레스타인과 연대를 말한다면 난민과 평화를 위한 정책이 뒤따라야 하고, 차별 반대를 말한다면 노동과 복지, 교육에서 실제 평등을 실현하는 제도가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상징은 출발점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예선 A조 2차전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열린 멕시코 과달라하나 스타디움에 19일 ‘국제 혐오 표현 반대의 날’을 맞아 국제축구연맹(FIFA)이 혐오표현 근절 캠페인을 대형 전광판에 노출하고 있다. [로이터] - 출처 월드컵 악성댓글 39만개, FIFA도 나섰다 “혐오, 멈춰” 한-멕시코 경기 전광판 노출된 이유 - 헤럴드경제

 

더 나은 사회는 가능하다는 메시지
 
이번 월드컵은 우리에게 축구 이상의 것을 보여줬다. 최고의 선수들이 가장 큰 박수를 받은 것은 골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했고, 혐오보다 연대를 선택했으며, 과거의 상처를 기억하려 했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에서 스포츠의 감동뿐 아니라 더 나은 사회의 가능성을 보았다.


진보정치가 배워야 할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더 많은 구호를 외치는 정치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저 정치가 우리의 삶과 존엄을 지키는 정치"라고 느끼게 만드는 정치 말이다.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면, 진보정치의 과제는 선거에서만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상식 속에 연대와 평화, 존엄의 가치를 새로운 헤게모니로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다. 그 길 위에서 정치는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

 

 


김종민 (또다른플랜 공동대표, 정의당 은평을 지역위원장)